2007/02/12 09:00

당신은 왜 복종하며 사는가(시민의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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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전쟁은 왜 일어났나

1835년 말 멕시코령 텍사스지역에 들어와 살던 백인들이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하려 하자 멕시코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당시 텍사스지역의 백인들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동부지역에서 영국과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기회를 엿보던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자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고, 멕시코에 대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까지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국과 멕시코 양국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결국 1846년 미국은 멕시코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미군은 일방적으로 멕시코를 몰아붙인 끝에 1848년 멕시코땅 3분의 1을 차지하는 대신 1825만달러를 지불하는 조약을 맺게 됐다.

개인의 양심은 법에 우선한다

당시 미국 내에서 미국­-멕시코전쟁을 지지하던 세력은 제국주의자와 노예제도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은 영토 확장을 통해 세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정책에 적극 찬성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미국 정부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데다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까지 일으키자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히게 됐다. 친척이 인두세를 대신 내줘 곧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계기로 ‘시민의 불복종’을 저술했다.

개인의 양심은 국가를 비롯한 그 어떤 외부세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개인주의자 소로우에게 미국이 일으킨 멕시코전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소로우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국가와 법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행위를 가장 경계했다. 실제로 소로우는 사회는 양심을 가진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 민병대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돌아버린다.

당신은 침묵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법과 국가의 가치관에 판단근거를 맡기는 행위는 ‘투철한 준법정신’이 아니라 ‘도덕적 불감증’이라는 것을 소로우는 간파했다. 이미 우리는 역사 속에서 ‘도덕적 불감증’의 폐해를 경험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고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개인의 양심에 따르는 수고를 덜고 성찰없이 국가의 가치관을 따르는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소로우는 무능하거나 폭압적인 정부에 대한 혁명의 권리가 인정된다면, 그 권리의 범위를 일상적인 정부의 통치행위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개인의 양심을 위한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멕시코 전쟁 당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을 끝내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로우는 이는 잘못된 것이며 투표나 세금 거부 등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메사추세츠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정의가 자신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만약 그들이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두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주 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소로우의 주장이 과격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회혁명을 앞세우지 않고 개인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이 흔히 “내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선민의식에 빠져 일반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소로우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려 했다. 그리고 거기엔 “아직 힘이 부족하니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으니까”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불의를 보면서 현실 타령을 하는 것은 불의에 타협하는 자와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적이지 않다. 그는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소신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또 대중이 아닌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강승영 옮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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