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12 09:00

당신은 왜 복종하며 사는가(시민의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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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전쟁은 왜 일어났나

1835년 말 멕시코령 텍사스지역에 들어와 살던 백인들이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하려 하자 멕시코는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당시 텍사스지역의 백인들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동부지역에서 영국과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기회를 엿보던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자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고, 멕시코에 대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까지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국과 멕시코 양국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결국 1846년 미국은 멕시코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미군은 일방적으로 멕시코를 몰아붙인 끝에 1848년 멕시코땅 3분의 1을 차지하는 대신 1825만달러를 지불하는 조약을 맺게 됐다.

개인의 양심은 법에 우선한다

당시 미국 내에서 미국­-멕시코전쟁을 지지하던 세력은 제국주의자와 노예제도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은 영토 확장을 통해 세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정책에 적극 찬성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미국 정부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데다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까지 일으키자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히게 됐다. 친척이 인두세를 대신 내줘 곧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계기로 ‘시민의 불복종’을 저술했다.

개인의 양심은 국가를 비롯한 그 어떤 외부세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개인주의자 소로우에게 미국이 일으킨 멕시코전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소로우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국가와 법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행위를 가장 경계했다. 실제로 소로우는 사회는 양심을 가진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 민병대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돌아버린다.

당신은 침묵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법과 국가의 가치관에 판단근거를 맡기는 행위는 ‘투철한 준법정신’이 아니라 ‘도덕적 불감증’이라는 것을 소로우는 간파했다. 이미 우리는 역사 속에서 ‘도덕적 불감증’의 폐해를 경험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고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개인의 양심에 따르는 수고를 덜고 성찰없이 국가의 가치관을 따르는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소로우는 무능하거나 폭압적인 정부에 대한 혁명의 권리가 인정된다면, 그 권리의 범위를 일상적인 정부의 통치행위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개인의 양심을 위한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멕시코 전쟁 당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을 끝내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로우는 이는 잘못된 것이며 투표나 세금 거부 등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메사추세츠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정의가 자신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만약 그들이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두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주 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소로우의 주장이 과격해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회혁명을 앞세우지 않고 개인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이 흔히 “내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선민의식에 빠져 일반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소로우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려 했다. 그리고 거기엔 “아직 힘이 부족하니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으니까”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불의를 보면서 현실 타령을 하는 것은 불의에 타협하는 자와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적이지 않다. 그는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소신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또 대중이 아닌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강승영 옮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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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5 09:00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환자의 입에서는 기관 튜브가 천장을 향해 튀어나와 있었다. 입술에는 삽관할 때 잇몸이 다쳐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그로 인해 겨우 20분 전에는 평온했던 환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있었다.
그러나 기타자와는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 환자의 얼굴보다 한 번 정지했던 심장을 15분동안이나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인생처럼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환자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폭풍에 휩싸인 돛단배처럼 의사들에게 실컷 농락당한 뒤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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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응급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가 들어오면 의사와 간호사는 재빨리 상태를 파악해 인공호흡과 심장마사지를 실시한다. 필요하면 신체 일부를 절개해 호흡관을 집어넣고 생명을 연장하는 약물을 처방한다.

하지만 일본인 의사 야마자키 후미오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후미오는 1975년 지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8년동안 같은 대학 부속병원 제1외과에서 근무했다. 또 1984년부터 7년 동안 지바현 요카이치바 시립병원 수석의사를 지냈으며, 지금은 도쿄 사무라마치병원 호스피스케어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그는 수십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특히 수많은 말기암 환자를 만났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왜 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누구를 위한 시술인가

앞의 인용문은 기타자와라는 초년 의사의 일화다. 의대를 졸업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기타자와는 병원을 지키고 있다가 급성신부전 환자를 받게 됐다. 그는 환자에게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기관에 튜브를 삽입하려다 실패했다. 결국 그는 튜브 삽입 대신 심장 마사지만 해야 했고, 환자의 자발호흡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의사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기타자와에게 한 위암 환자가 눈에 띄웠다. 그는 이 환자의 주치의에게 얼마전 자신이 실패한 기관 내 삽관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주치의는 이를 승낙했다. 이 환자가 거의 임종 순간에 이르자 기타자와는 심장 마사지를 해 심장 박동을 일시적으로 되돌린 뒤 기관 내 삽관을 시도했다.

임종 직전의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타자와는 환자의 입을 벌려 혀뿌리 안쪽 깊숙한 곳의 쐐기 모양의 공간을 확보하고 기관 튜브를 삽입했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이가 부러졌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환자는 15분 동안 심장이 더 뛰었지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주치의는 유족에게 이와 같은 말을 건넸다. "여러가지로 손을 써봤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느껴라

이런 일화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병원에서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아니, 너무 흔해서 아무도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미오는 환자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병원의 현실을 뭔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근 6년 동안은 나도 모르게 죽어가는 환장의 입자에서 나 자신을 세워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의사로서 환자를 상대하면서 무책임하다"는 소실르 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병원이라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려 만약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결코 내 마지막 삶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말기 암 환자 중 3분의 1은 통증을 느끼지않고 죽는다. 또 통증을 느끼는 나머지 3분의 2 중에서도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지는 않는다. 현대 의학으로도 손을 쓸 수 없는 말기 암 환자 중 상당수가 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다. 비록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최소한 죽는 순간만큼은 평온하고 인간답게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배려인 것이다.

물론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그들이 죽는 순간을 몇 분이라도 더 늦추려고 하는데만 집중한다. 이는 고통이 없는 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죽는 순간을 늦추려고 하는 의술 행위 자체가 생의 마지막 고통이다. 하지만 의사에겐 환자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게 하는 치료 행위가 더 중요하다. 인간을 위한 의술이라고 하지만 어느샌가 인간은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녀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 피곤해서 자고 싶다면 수면제 주사를 놔달라고 했다.... 그녀는 "기다릴게요" 말하고 얼마 안 있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열두 시간 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의 이별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처럼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죽음이 무서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녀는 거짓말 속에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 나갈 때 이 같은 마지막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불치병 환자를 보는 유족들은 그가 단 하루라도, 아니 1시간, 1분이라도 더 살아있기를 바란다. 인생을 함께 한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현대 의술은 죽어가는 환자의 생명을 몇 분씩이라도 연장시키는 방법을 개발하며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술이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환자뿐만 아니라 모든 의술이 필요없는 상황에 이른 환자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환자 자신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 자신의 임종 직전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죽음을 직감하고 "내가 죽을 땐... "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면 가족들이 불길하다며 이를 막는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자기 자신부터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평온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현대인들이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는 이유는 이같은 삼박자가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악순환을 깨기 위한 첫 단추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과연 나는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는 허용하고 있는가.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야마자키 후미오. 김대환 옮김. 상상미디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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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9 00:00

한국어의 감옥에서 놀자(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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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오래도록 나는 그 감옥 속을 어슬렁거렸다. 행복한 산책이었다. 이 책은 그 산책의 기록이다.
고종석은 산문집 '언문세설'에서 "모국어는 감옥"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났을 때, 아니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언어는 내 사고를 확장하는 중요한 도구이면서 한국어는 사고의 확장을 막는 감옥 역할을 한다.

고종석은 감옥을 산책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감옥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탈출을 감행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감옥 안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감옥 안에서 얼마나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럽다는 느낌 속에서 한국어의 감옥이 주는 행복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버스 안'과 '버스 속' 중 무엇이 맞을까. '끝 곡'과 '마지막 곡' 중에서 맞는 표현은. '기쁘다'와 '즐겁다'의 차이는.

국내 최초의 뉘앙스사전이라 이름붙일 만한 이 책은 우리가 아무 차이없이 쓰고 있는 말들이 얼마나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지 세세히 설명한다.

그렇다고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내가 쓰고 있는 말이 혹시 틀린 표현인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어머니가 세뱃돈을 주셔서" 다음에 즐거웠다가 아닌 기뻤다가 어울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또 "어머니에게 세뱃돈을 받고 나니 하루가" 다음에 기뻤다가 아닌 즐거웠다가 나와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말 그대로 '그냥' 알고 있다.

다만 우리는 한국어가 이토록 섬세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언어라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한다. 한국어가 기쁘다와 즐겁다도 구분하지 못하는 둔감한 언어였다면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한 평도 되지 않는 감옥 안에서 갑갑해하는 재소자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어가 섬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가진 언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한국어의 감옥이 한평짜리가 아닌 수천, 수만평의 넓이를 지닌 감옥이기에 고맙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낱말편 1). 김경원. 유토피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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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9 00:00

진짜 여행은 자전거로 가야 한다(가보기 전엔 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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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위해서 가끔 자전거로 한강 자전거도로를 달린다. 자전거도로의 끝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동쪽끝과 서쪽 끝, 남쪽 끝은 모두 확인했다. 한강 자전거도로는 동쪽으로는 광나루, 서쪽으로는  가양대교, 남쪽으로는 용인까지 뻗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전거도로의 끝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도로를 넘어서 계속 달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때문에 대학생때는 서울에서 경북 영천까지, 회사원이 된 뒤엔 제주도를 자전거로 달렸다. 하지만 아쉬웠다.

'가보기 전엔 죽지 마라'의 지은이 이시다 유스케도 소박한 욕망 때문에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각 대륙에 숨어 있는 '세계 최고'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출발했다.

지은이 이시다 유스케는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여행을 떠날 때, 나는 한 가지 뚜렷한 목표를 정했다.
"어차피 세계일주를 할 거라면, 세계 최고를 발견하자!"
무엇이 세계 최고인지는 당연히 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봐서 세계 최고라는 생각이 들면 그게 바로 세계 최고인 것이다. 자연의 풍경도 좋고, 유적지도 좋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마을도 지구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원래 그의 계획은 3년. 하지만 여행이 너무 재미있어 그 계획은 7년으로 늘어났고 여행 도중에 그가 들른 나라만 87개국, 거리는 9만5000km에 이른다.

자전거여행이 주는 최고의 매력은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에 있다. 인간은 점점 빠른 교통수단을 가지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그 속도에 적응하는 법을 체득하진 못했다.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갈 때 10시간을 비행기에 있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기술은 유럽까지 10시간만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시간이 짧아지면서 감동도 사라졌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이 주는 매력은 사라져버렸다.

자전거는 분명 걷기보다 빠르지만 그 속도는 인간이 적응하기에 충분하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게다가 스스로 여행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 자전거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교통수단인 셈이다.

이시다 유스케도 자전거여행을 선택한 이유로 "내 발로 최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야말로 보물을 만났을 때의 감동과 기쁨이 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이야기'이다. 유적지를 보면서 어쭙잖은 감상을 늘어놓는 법이 없다. 유명한 관광지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자전거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자전거여행을 하는 사람,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로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여행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서도 재미있다.

언젠가 자전거여행을 떠나야겠다. 거창한 목표의식은 없다. 20대 초반에 가졌던 도전정신도 지금은 없다. 단지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야 하는 이 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도로가 있고, 풀이 있고, 집이 있는 풍경이 계속되더라도 한번도 밟은 적이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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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아쉬운 점은 바로 제목이다. '가보기 전엔 죽지 마라'라니. 한 때 여행책 제목으로 유행했던 '죽기 전에 가봐야 할 OOO'을 떠올리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은 여행지를 소개한 흔한 관광책으로 보인다. 편집자는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반드시 자전거여행을 떠나야한다는 취지로 제목을 달았을지 모르지만 독자가 보기엔 경치좋고, 풍광좋은 여행지를 소개한 여행서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보기 전엔 죽지 마라. 이시다 유스케. 이성현 옮김. 홍익출판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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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09:00

그들은 왜 시체를 토막냈나?(아웃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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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나츠오의 아웃은 추리소설로 분류되지만 독자가 범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살인사건은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일어나며 지은이 기리노 나츠오는 친절하게도(?) 죽은 자와 범인의 신원을 알려준다. 이러한 설정만으로도 소설은 범인 찾기가 아니라 살인 사건 후 범인들의 심리를 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살인 사건에 휘말린 네명의 여인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데 있다. 범죄와는 거리가 먼 주부들이 범죄에 휘말리면서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나머지 세명의 여인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 마사코조차도 치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인사건은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사건으로 커져간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히 살인사건 이후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한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아웃'이 매력적인 이유는 등장인물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나 있을 수 있는 이웃, 또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등장인물을 이렇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하루하루 고통받는 요시에,  남편과의 잠자리는 커녕 기본적인 관계조차 끊어진 마사코,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빌릴 정도로 궁핍하지만 허영만은 살아있는 쿠니코, 남편이 타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야요이.

이들은 삶을 연명하기 위해 또는 허영을 채우기 위해 밤새도록 도시락공장에서 일을 한다. 끝도 없는 일거리 앞에서 이 여인들은 왜 자신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삶은 그들이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질문을 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만큼 잔인하다.

특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채업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나타내고 있다. 사채업자들에게 사회의 밑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대는 인간은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갈 곳 없는 그들에게 사채는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잡아야 할 마지막 등불과 같은 존재다. 등장인물들이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도 자본주의가 허용한 기생충인 사채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이 어떻게 파멸로 몰아가는지 알고 싶다면 이 추리소설을 권하고 싶다.

<기리노 나츠오. 홍영의 옮김. 다리미디어.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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