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2 19:27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읽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격 추리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쓴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트릭과 추리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뒤늦게 읽은 '백야행'은 3권짜리라는 작품의 분량답게 20년 가까운 세월을 담아내며 히가시노가 다른 작가들에 뒤지지 않는 무게감 있는 작품을 쓴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백야행의 두 주인공은 20년간 서서히 악인으로 변해가면서, 아니 이미 악인이 된 듯이 주위 사람들의 인생을 잠식해 나간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그리면서도 히가시노 특유의 간결한 문체는 힘을 잃지 않는다. 물론 간결하다 못해 도대체 등장인물이 그토록 집착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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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6 13:14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를 읽다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인공 김전일이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라고 말할 때 그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코스케가 나오는 일본 추리소설. 

2차 대전후 일본에서 추리소설 붐을 일으킨 작품 중 하나로, 일본 추리소설의 중요한 고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추리소설 붐 초기에 발간된 작품이니만큼 일본에서는 수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작품의 약점이기도 하다. 전래동화를 읽는 것처럼 지은이의 생각이 과도하게 들어간 것이 눈에 거슬린다.

또 지은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섬세한 퇴고보다는 왕성한 다작을 하는 작가이니만큼 섬세하지 못한 표현도 읽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일본 추리소설 붐의 원류를 엿본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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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19:25

'죽음의 밥상'이냐 죽음의 번역이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당시 시험때마다 번역본을 찾아다녔다. 과목에 따라 영어 소설 한권 전체가 시험범위였으니 실력없는 학생이었던 내게 번역본은 시험을 보기 전 필수 아이템이었다.

<'분업식 번역본'을 아십니까>

시중에 나와있는 번역본이 없을 땐 영문과 학생들이 모여 스스로 번역본을 만들기도 했다. A라는 학생이 1~10쪽을 번역하고, B가 11~20쪽, C가 21~30쪽을 번역하는 방법으로 번역본을 만들어 시험 직전 이를 취합해 하나의 완성된 번역을 만들었는데 가히 '분업식 번역본'이라 할만하다.

'분업식 번역본'은 실력없는 영문과 학생에겐 가뭄끝 단비같은 존재였지만 문제점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학생 실력에 따라 번역 수준이 들쑥날쑥해 번역실력이 좋은 학생일수록 자신의 능력에 비해 수준이 낮은 번역물을 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시험때만 보고 버리는 탓에 번역 수준이 원래 형편없는 데다가 실력이 좋은 학생들마저 굳이 신경써서 번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분업식 번역본'은 말 그대로 참고물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영어 원문을 읽는 것이 이해가 빠를 때도 있었다. 그런데, 대학시절 '분업식 번역본'을 보았을 때 느꼈던 난감함을 2008년 4월에 다시 느꼈다.

'죽음의 밥상'은 값싼 가격이라는 가면 속에 숨은 현대 농업과 축산업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4월에 출간된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각 언론사들이 비중있게 소개했다. 생쥐깡 사건, 미국 소고기 수입 허가 등 먹거리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심도 깊게 짚은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신문사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결점, 즉 형편없는 번역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번역자?>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신문사의 서평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난 곧바로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책 본문 중 일부를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그 때 대학생 시절 형편없는 번역으로 뒤범벅된 '분업식 번역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는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이 책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식 농법은 전통식 농법보다 싸게 먹힌다는 이유에서 널리 퍼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소비자에게 싼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것이 그 비용의 일부를 남들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장식 농장 쪽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곳, 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깨끗한 물과 공기를 누릴 수 없다. 또한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위험한 작업장에서 부상의 위험을 안고 일한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단지 하찮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장식 농업은 더 큰 비용(그리고 위험)을 우리 모두에게 전가하고 있다. 지금 정부가 조류독감 대책을 위해 쓰는 비용에 맞먹는 액수의 세금을 닭고기 업체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 징수한다면, 우리는 공장식 농업으로 만들어진 닭고기가 결코 싸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p.59


내가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인문.사회과학 서적에서 "우리는 ~~라는 것을 알았다(보았다)"라는 식의 표현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도 영어의 We can see, We can know, I can see 쯤 되는 표현으로 짐작되는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아마도 영어 원문을 해석하지 않고 영어단어를 그대로 대입해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옮긴이가 번역작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대학생이나 조교들에게 '분업식 번역'을 맡긴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얼마나 번역이 엉망인지 위의 인용문 두번째 문장만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소비자에게 싼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인 중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한국어에 걸맞게 표현을 바꿔보자.

"실제로 공장식 농법은 소비자에게 값싼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면 무방하다. 퇴고라고 할 것도 없다. 웬만한 번역 실력이 있으면 처음 번역할 때부터 두번째 문장이 튀어나온다. 사전에 나와있는 영어단어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한 첫번째 번역은 아예 나올 수가 없다. 인용된 문단 전체를 고쳐보자.

공장식 농법은 전통식 농법보다 비용이 적다는 이유로 널리 퍼졌다. 실제로 공장식 농법은 소비자에게 값싼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용 일부를 남들에게 떠넘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공장식 농장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이상 깨끗한 물과 공기를 누릴 수 없다. 또 그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위험한 작업장에서 언제 다칠지 모르면서 일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단지 하찮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장식 농업은 더 큰 비용와 위험을 우리에게 전가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닭고기업체의 환경 개선을 이유로 조류독감 대책에 쓰는 세금만큼만 징수해도, 공장식 농업으로 만들어진 닭고기가 지금처럼 싸지는 않을 것이다.

문장을 매끄럽게 바꿨을 뿐인데도 의미 파악이 훨씬 쉽다. (중간에 굵은 글씨로 표기된 부분은  도저히 뜻을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다.)


<죽음의 번역들>

내 번역이 '죽음의 밥상' 원문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어서 얼마나 정확한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번역자가 번역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였어도 저런 엉터리 번역은 나오지 않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죽음의 번역'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다른 인용문과 그것을 고친 번역문을 살펴보자.


소들이 먹는 이상한 음식이 옥수수만은 아니다. 유럽에서 광우병이 중대 문제로 떠올랐을 때, 그것이 연관된 질병에 걸린 양의 골분(骨粉)을 소에게 먹인 결과임이 알려지자 대중은 경악했다. 대체 언제부터 소가 육식동물이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조차도 소에게 젤라틴, ‘접시 쓰레기(레스토랑의 고기 요리 찌꺼기)’, 닭고기와 돼지고기, 닭장 쓰레기(닭똥, 닭 시체, 닭털, 먹다 남은 모이 등), 그리고 소의 피와 지방이 포함된 사료를 주는 것이 합법이다. 그리고 먹다 남은 모이 중에는 소에게 직접 주는 것은 불법이지만 닭에게 주는 것은 합법인 소고기와 뼈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p.97

이 이상한 번역을 대충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소에게 먹이는 이상한 음식은 옥수수로 그치지 않는다. 유럽에서 큰 문제가 된 광우병의 원인이 광우병과 연관된 병에 걸린 양의 골분을 소에게 먹였기 때문으로 밝혀지자 대중은 경악했다. 대체 언제부터 소가 육식동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에도 소에게 합법적으로 젤라틴, ‘접시 쓰레기(레스토랑의 고기 요리 찌꺼기)’, 닭고기와 돼지고기, 닭장 쓰레기(닭똥, 닭 시체, 닭털, 먹다 남은 모이 등), 소의 피와 지방이 포함된 사료를 주고 있다. 특히 닭이 먹다 남은 모이 중에는 닭에게 합법적으로 먹일 수 있는 소고기와 뼈가 포함될 수 있다. 소고기와 뼈를 소에게 직접 주는 것은 불법이지만 닭이 먹다 남은 모이를 주는 것은 합법이다.


두번째 인용문도 첫번째 인용문에 필적할 만큼 번역이 이상하지만 세번째 인용문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얼마나 이상하고 성의없는 번역을 했는지 세번째 인용문부터 보자.


치유 불가능한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의식 있는 인간도 타인의 뜻에 따라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이 원칙의 경계를 우리 종에 한정하지 말고 의식이 있고 박해받을 수 있는 다른 동물에게 확대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종 주위에만 도덕의 금을 긋고, 우리의 종 중에서 ‘도덕적 존재로서의 능력’이 많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보다 떨어지는 구성원들도 그 도덕을 근거로 보호하면서 다른 동물은 배척하게 될 것이다. 이 경계 넓히기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그런 도덕의 금을 더 좁게, 자기들 주위에 그으려는 시도를 막지 못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p.347

이 이상한 번역을 또 고쳐보자.

치유가 불가능한 정신장애인를 포함한 어떤 사람도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이 원칙을 인간에 한정하지 말고 의식이 있는 동물까지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동물보다 도덕적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에게도 도덕 원칙을 적용하면서, 동물들은 배척하고 있다. 도덕적 경계 넓히기에 실패한다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특정 인종이나 성만을 도덕적 원칙에 포함하려 하는 시도를 막지 못할 것이다. 또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도 못하게 된다.

도대체 '치유 불가능한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의식 있는 인간'이란 누구일까? '타인의 뜻에 따라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유지'한다는 행동은 또 무엇일까? 이게 번역이라면 인터넷에 떠다니는 자동번역기의 번역도 번역이다.


<왜 이런 번역이 나왔을까?>

이런 번역은 왜 나오게 됐을까. 출판사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어서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지만, 한국 출판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아닐까 짐작된다. 아마도 이 책을 기획한 출판사는 출간 시점을 4월로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생쥐깡'사건 등 식품 관련 사고가 줄줄이 터지자 식품사고와 연관이 있는 이 책을 서둘러 내놓으려 했을 것이다. 아직 식품사고의 여파가 남아있을 때 책을 출간해 한권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판업계라는 곳이 1~2개 출판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세업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번역자에게 번역을 빨리 끝내라고 독촉했고 그 때문에 이런 형편없는 번역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번역이 나올리가 없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나쁜 번역이라도 책 한 권 더 파는 게 좋은 번역이라도 책 한 권 덜 팔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죽음의 밥상'은 그동안 말로만 떠돌던 현대 농업, 축산업의 숨은 폐해을 파헤친 참신한 책이다.  하지만 출판업의 숨은 폐해 때문에 이 책은 문제점 가득한 책으로 변해버렸다. 저 엉터리 번역 때문에 서점에서 직접 책을 들춰보고 싶은 생각조차 없어졌다. 좋은 책 한권, 나쁜 번역이 간단하게 말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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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19:25

교육 기사로 본 신문사들의 성향(상 - 보수신문)

신문사의 성향을 진보 또는 보수로 나눌 때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까? 부동산 정책? FTA 찬반 여부? 복지정책에 대한 입장? 그것도 아니면 대운하정책에 대한 입장?
저마다 진보 또는 보수를 구분짓는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10대 일간지의 성향은 보수 6(조선, 중앙, 동아, 문화, 세계, 국민), 중도 2(한국, 서울), 진보 2(한겨레, 경향)으로 나누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교육 관련 기사에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꼼꼼히 따져본다면 보수 또는 중도, 진보적인 신문사 내에서도 사안에 따라 논조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경우엔 그 진폭이 더 크다. 그렇다면 교육과 관련해 신문사들의 논조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지난 4월 16일 우열반 편성 허용을 골자로 한 교육과학부의 '학교 규제 해제계획'의 관련 보도를 보면서 살펴보자.


<조선, 동아 - 교육은 경쟁이다. 그리고 돈이다.>

우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6일자 '학교 규제 해제계획' 관련 기사부터 살펴보자. 석간인 문화일보를 제외한 9개 신문은 모두 1면에 스트레이트 기사와 함께 종합면 또는 사회면을 하나 정도 할애해 관련기사를 실었다. 조선과 동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아의 경우 1면과 사회면, 조선의 경우 1면과 8면에 관련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1면
0교시 수업-우열반 허용
어린이신문 구독금지 등 29개 규제 폐지

사회면
보충수업 강화-사설 모의고사 비교평가 늘듯
수업 시간-시험 관리 등 획일적 규제 대폭 풀어
학교 자율권은 확대... 학력 경쟁 과열 우려도
극단적 우열반 편성 반대여론 커 시행 힘들듯

시도교육청들 "환영" 속 학생-학부모 혼란 걱정도
교총 "교육자치 내실화 방향 공감"
전교조 "무한 성적경쟁 조장" 비난


조선일보 1면
우열반.0교시수업 학교 자율로
교육과학부, 정부 권한 일선 학교에 넘겨

8면
학교운영, 교육감.교장에 맡긴다
'방과후 학교' 영어.수학 등 교과목까지 확대
특목.자사高 법령은 조만간 함께 확정하기로

어린이신문 '단체구독 금지'도 풀려
盧정부때 '비판언론 길들이기' 차원서 금지 지침
서울 초등교장協 "신문활용 수업은 세계적 추세"

"규제 없앴다" 환영속 일부 사안엔 우려도
'학교 자율화' 교육현장.학부모 반응

그동안 조선과 동아는 "교육은 경쟁"이라는 신념 아래 학생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해야 전체 학력이 높아진다는 논리를 펴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교육과학부의 조치는 이들 신문사가 당연히 환영할만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어린이신문 구독금지 폐지'에 관한 내용이다. 동아의 경우 1면 기사 중간제목에 '어린이신문 구독금지 등 29개 규제 폐지'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조선은 8면에서 아예 별도의 기사를 작성해 어린이신문 구독금지 폐지 사실을 부각시켰다.

어린이신문 단체구독은 노무현정권때인 지난 2006년 6월 교육부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교육부는 학교에서의 일괄구독은 금지하고 대신 가정에서 자율적으로 구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학생 부담으로 특정 신문을 획일적으로 학습 보조자료로 활용하지 말라는 지침을 각 시도교육청에 내려보냈다.

당시 정부가 이러한 조치를 내린 이유는 어린이신문 단체구독이 사실상 강제구독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특정 어린이신문을 학습 보조자료로 활용할 경우 학부모 입장에서는 그 신문을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다. 또 학교가 앞장서 특정 신문의 구독을 종용하면서 스스로 신문 판매업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번 조치로 어린이신문 단체구독 금지지침이 폐지되면서 예전 강제구독의 부작용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어린이신문을 발행하는 조선, 동아일보는 '신문활용 수업은 세계적 추세'(조선)라면서 적극 반겼다. 조선, 동아일보가 이 조치를 환영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돈 때문이다. 단체구독 금지 직전인 2006년 4월에 어린이신문을 구독하는 학생은 28만8000여명에 달했다. 단체구독 금지가 해제되면 예년의 구독자수를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또, 조선과 동아는 현재 신문사와 연계된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어린이신문 단체구독이 부활하게 되면 어린이신문을 통해 자사의 교육사업을 알리고, 구독학생을 자신들의 교육사업 수요자로 끌여들이려는 홍보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번 조치를 발표하기 전에 조선, 동아일보와 얼마나 교감을 나눴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이번 조치로 인해 조선, 동아일보는 0교시 부활 논란 속에서 적잖은 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중앙, 문화 -0교시 부활 반론은 없다! 정말?>
또다른 보수적 성향의 신문인 중앙일보와 문화일보는 큰 틀에서 볼 때 조선, 동아일보의 보도내용과 차이가 없다. 이들 신문은 '학교 규제 해제계획'의 관련 사실만을 나열하는 기사를 싣는 수준에서 그쳤다. 교육현장에도 현재 한국 사회와 같은 치열한 경쟁논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 신문의 입장에선 환영할만한 조치다. 그렇다면, 환영한다는 내용의 기사는 보이지 않는대신 관련 사실만을 나열하는 정도에 그친 기사를 실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각 신문의 제목부터 보자.

중앙일보 1면
초.중.고 석차 따라 반편성 허용
고교 아침.야간 보충수업 금지도 풀려
교육부 "16개 시.도교육청 자율에 맡겨"

사회면
사설 모의고사 수시로 볼 수 있다
"학력을 높여라" 무한 경쟁 돌입

교사들 "수준별로 맞춤형 수업 가능"
학생들 "0교시 생긴다고 실력 늘까"
교사.학생 반응 엇갈려

시.도교육청 "준비 안 됐는데..." 당혹
"자율 정착 시간 필요"

문화일보 사회면
우열반.0교시 허용... '기대반 우려반'
방과후 학원강사 수업 등도 가능해져
시도교육청 "환영하나 시간 필요하다"

교과부 지침 작년에만 1909건 '실효성 의문'
지적 나올때마다 미봉책... 규제만 양산

중앙, 문화의 관련 기사 제목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신문사의 입장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내용이 없다. 그저 관련 사실만을 나열했을 뿐이며, 교육계 주변의 찬반입장을 조그맣게 소개했을 뿐이다.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했던 경쟁논리가 교육에도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시발점이 되는 이번 조치를 이렇게 단순 나열식으로 보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보도행태를 보면 보수 신문들이 0교시 부활에 대한 반대여론을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반발여론을 거의 취급하지 않으면서 마찬가지로 찬성여론에 대해서도 크게 다루지 않아 겉으로 볼 때는 마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듯 보인다. 제목으로만 따진다면 찬반 중 어느쪽도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사실만을 보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학교교육을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는 이런 사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소개하지 않고 마치 이번 조치가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사실보도만을 하는 것은 사실상 찬성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 찬성입장을 부각시킨 기사를 작성할 경우 반대 여론의 반발이 매우 거셀 것을 예상하고 아예 그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 단순 사실 전달에 머문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FTA등 자신들이 찬성하는 정책에 대해선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보수신문들이 반대 여론을 다른 어떤 사안보다 더 신경쓰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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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1 13:45

이제 결선투표 도입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17대 대선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무난히 당선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대선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투표율이 가장 낮을 정도(63.0%)로 국민의 관심이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선관위는 "차악이라도 뽑아야 한다"는 이례적인 광고까지 하며, 투표를 독려했지만 결국 60%를 갓 넘은 투표율로 기록하고 말았다.

이번 대선은 낮은 투표율 못지 않게 과연 이명박 당선자가 절반이 넘는 득표를 할 수 있느냐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역대 대선에서 한 번도 과반 당선자가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처음으로 과반 득표 대통령이 나온다면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대통령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추진력있게 정책을 이끌어갈수 있는 것은 물론, 현재 이명박 당선자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을 털고 가는데도 영향력을 미칠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율과 득표율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한 이유는 바로 결선투표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투표율이 어느 정도 떨어지는 현상은 일반적이다. 또 정치 영역이 사회 다른 영역의 발전속도를 따라잡기 못하면서 생기는 정치 냉소현상 또는 혐오현상 또한 투표율 저하에 한 몫한다. 즉, 어느정도의 투표율 감소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사회현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날이 투표율이 감소하는 현상에 대해 손을 놓고 있자는 뜻은 아니다. 투표율 감소를 사회적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대표성의 자격'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당선된 이명박 후보는 48.7%의 득표율로 당선됐는데, 이를 투표율 63.0%에 대입해보면 전체 유권자 중 약 30% 정도의 지지만 얻었다는 뜻이 된다.

이를 뒤집어보면 선거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잘 조직된(다시 말하면 적극적으로 투표소에 가서 특정 후보를 찍을 용의가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30%의 소수만 확보하면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70%의 다수를 누르고 승리할 수 있는 역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경선에서 선전했던 이유, 통합신당 경선에서 손학규가 부진하고, 정동영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도 폭넓은 인기보다는 제대로 조직된 소수만 있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행 선거방법으로는 이러한 아이러니의 효과를 상쇄시킬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단 한번의 투표로 끝나는 투표 방법으로 인해 조직된 소수가 조직화가 덜 된 다수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크다. 이 때문에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결선투표나 선호투표(좋아하는 순서대로 후보를 뽑는 제도)를 도입해 조직된 소수가 선거 결과를 왜곡하는 현상을 막아내려 한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결선투표가 도입됐을 경우엔 선거 결과가 바뀔 수 있었을까? 사실 결선투표에서 1차 선거의 결과가 뒤집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동계올림픽 유치도시 선정과정에서 평창이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도 결선에서 러시아의 소치에 밀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투표에서는 1차 투표의 결과가 거의 그대로 결선에서 반영된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보수 성향의 이회창 후보가 15.1%의 득표를 한 점으로 미뤄볼 때 보수를 대표하는 이명박 후보가 결선에서도 무난히 승리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물론 변수는 있을 수 있다. 결선투표의 경우 1:1 대결이기 때문에 다자구도보다는 선호도보다 혐오도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다자구도에서는 싫은 사람을 제외할 수가 없다. 사람마다 후보간 선호도나 혐오도는 모두 다르지만, 특정 후보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후보들은 모두 '선택받지 못한 후보'로 모두 한 묶음으로 묶이게 된다. 즉, 그 후보가 얼마나 싫으냐는 결과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오직 특정 후보가 얼마나 좋으냐가 더 우선적으로 반영된다.

반면, 결선투표는 1:1 이라는 특성상 기존 다자구도 선거에서 투표를 포기한 부동층을 대거 투표에 끌어들일 수 있다. 이 부동층들은 특정 후보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쉽게 말하면 그 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차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유권자가 결선투표에 참여할 경우엔 선호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도가 덜 한 후보, 즉 덜 싫은 후보에게 표를 주는 상황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결선에서 1차 투표의 결과가 뒤집어지게 된다. 또한, 결선투표에서도 조직화된 소수가 여론을 이끄는 부작용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후보가 50% 이상의 득표를 함으로써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뽑을 사람 없다" "그 놈이 그놈이다"라는 말만 하지 말고, 민심과 선거결과의 차이를 최소할 수 있는 결선투표와 같은 방법을 고려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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